〈가장 많이 알고 있음 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김진호 외 지음, 글항아리 펴냄
인류 역사상 십계명만큼 영향력 있는 법령도 없다. 십계명은 서로 다른 신과 교리를 가진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가 공유하고 있는 계명이자, 이 가운데 많은 계명은 현대 형법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종교의 신자가 아닌 비신도들도 알게 모르게 십계명을 의식하거나 지키며 산다. 김진호 외 9인의 신학 연구자들이 함께 쓴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글항아리, 2018)은 십계명을 신학적인 도그마로부터 방면시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접속시킨다. 필자 10명이 하나씩 집필을 맡은 십계명 중에 흥미 있는 대목들을 소개한다.

기원전 8세기 말에서 기원전 7세기 초에 전체적인 틀이 형성된 십계명은, 그것이 형성된 시대의 사회적 배경과 그 시대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아홉 번째 계명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가 대표적이다. 현대인들로 하여금 ‘그렇다면, 남의 남편은 탐해도 좋다는 말인가?’라는 우문을 낳기도 하는 이 계명은 엄밀하게 말해서 ‘아내’에게 방점이 찍힌 계명이 아니다. 계명의 본뜻을 알려면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애굽기 20:17)’라는 계명 전체를 숙고해야 한다. 여기서 계명을 듣고 준수해야 하는 사람은 남자(그)이며, 병렬 항목으로 늘어놓은 ‘집·아내·남종·여종·소·나귀’는 모두 동급이다. 여자는 남자가 소유한 여러 품목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따라서 아홉 번째 계명이 금지한 것은 이웃 ‘여자’가 아니라 힘으로 이웃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탐심’이다.

십계명이 이성애 남성 가부장 시대의 율법이라는 것은 여섯 번째 계명 ‘간음하지 말라’가 유대 사회에서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으로 증명된다. 제1성서(구약)의 많은 사례는 유대 사회가 일부다처를 죄악시하지 않았다고 말해준다. 또 간음이 의심되거나 간음을 저지른 여성을 처벌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상세하지만, 남편의 간음이 부인으로부터 의심받는 경우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관한 구절은 성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간음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 계명은 여자에게만 엄혹했다. 이제 십계명을 받들 때 아래 사항을 반드시 염두에 두자.

“십계명은 본문을 읽어보면, 그것이 매우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청중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부모와 자녀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여자에게 욕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십계명은 노예를 소유했거나, 농토와 가축을 소유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한편, 종교적으로 이 청중들은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려 숭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며, 우상을 만들거나 세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정용택).”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세 번째 계명은 십계명이 경제적으로 사유재산이 있고, 법적·종교적 권리를 가진 성인 남성의 준수 사항이자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준다. 안식일은 신에게 하루를 온전히 바친다는 종교적 의미와, 주기적 휴식을 통한 노동력의 재충전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이지영 그림
그런데 이 계명 역시 신앙이 독실하고 부유한 남성인 “너희”에게 규제된 것이었다. 이때 자식과 종들은 “너희”라고 불리는 이들이 누리는 혜택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덤을 받는 수혜자에 지나지 않는다. 즉 종이나 이방인은 안식일의 주체가 아니었다. 명절에도 일을 하는 유통업체 직원과 외국인 노동자의 처지를 떠올려보라.

십계명은 인간이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한 최초의 세 계명과, 인간이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한 나머지 일곱 계명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네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인 것은 고대 유대 사회 역시 동아시아의 유교 사회처럼 효를 중시한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십계명을 재해독하면서 각 계명을 급진화하고 있는 이 책은 네 번째 계명이 완전해지려면 ‘아동 학대 금지’가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서에는 자녀를 매로 징계하라는 권고가 자주 나오는데, 이런 구절들과 네 번째 계명이 합쳐지면 학대받는 아이의 내면을 더욱 피폐케 한다. “이때 종교는 학대받은 아이의 ‘나쁜 아이’ 내면화를 더욱 정당화한다. 폭력과 학대 아래 고통받는 아동에게 이보다 더 해로운 것이 또 있을까?(김희선)”

다섯 번째 계명 ‘살인하지 말라’에 대해 쓴 필자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 중에서 지난 10여 년간 자살률과 자살 증가율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직시한다. 극단적인 양극화와 사회안전망 부재가 자살, 즉 사회적 타살을 방조하고 양산한다면 교회는 자살자를 비난하기에 앞서 이렇게 반문해봐야 옳다. “서바이벌 사회의 시스템과 그것이 초래한 절망, 바로 이것들이 많은 이로 하여금 스스로 생명을 끊게 한 자살 교사범이다. 그렇다면 제5계명을 지키라는 신의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가?(김진호)” 이 계명에 덧붙일 의견은, ‘양심적 병역 기피’를 교리로 채택하고 지지하지 못하는 한국 교회는 신과 인간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른 신을 존중하라’

십계명을 논하면서 첫 번째 계명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를 빠트릴 재간은 없다. 이 계명은 야훼가 이미 ‘다른 여러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어떤 경우라도 기독교도는 유일신론 (Monotheism)을 주장할 수 없다. 저 계명은 유대 민족이 “서로 다른 신을 모시면 단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다른 신이 아닌 야훼에게 집중해 민족적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정치적 주문이다(이찬수).” 이 계명의 가장 급진적인 개조는 ‘다른 신을 존중하라’일 것이다.

테리 이글턴은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알마, 2017)에서 계몽주의가 저지른 큰 잘못은 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종교와 절연한 것이라고 한다. 계몽주의는 종교와 절연하면서 문화나 예술을 종교의 대체물로 내세웠으나, 종교만큼 종합적이고 정치적인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계몽주의가 지속적으로 실패한 기간에 ‘숨어 있는 신’은 근본주의라는 괴물로 부활했다. 하버마스·데리다·바디우·드브레·아감벤· 지제크 등 좌파 진영의 사상가들이 “정치에 대한 종교적 ‘보충물’”을 찾는 이유는 ‘믿음, 희망, 정의, 공동체, 해방 등에 대한 세속적 개념과 종교적 개념 사이에 중요한 관련성’을 뒤늦게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을 헤아리자면, 종교와 해방 이념(좌파)을 잇는 최고의 가교로 십계명 재해석만 한 기획도 없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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