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6일 4차 촛불집회가 열리던 밤, 시위대 틈에 끼어서 차량이 사라진 광화문 네거리를 걷는데 전광판에 그가 죽었다는 뉴스가 떴다. 90세였다. 대한민국이 다시 불의한 권력에 치를 떠는 이때 1970~1980년대 젊은이들에게 독재에 항거할 힘을 불어넣어준 바로 그 사람의 부음을 접한 것은 공교로운 일이었다. 쿠바의 아주 오래된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바로 그 사람 말이다. 새삼 우리가 거리에서 참 오래 싸운다고 느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카스트로는 예나 지금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는 1959년 정월 초하루에 미국의 지원을 받던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바티스타 정권은 부패·매춘·도박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나쁜 쪽으로 전설이 되어가던 중이었다. 뒤에서 그 모든 검은돈을 관리하던 자는 미국의 마피아 러키 루치아노였다. 처음 쿠바에 상륙할 때 82명에 불과했던 카스트로의 군대가 민중 속에서 힘을 키워 결국 바티스타 일당을 몰아내자 쿠바 국민은 만세를 불렀다. 냉전의 양대 축이던 강대국 미국의 코밑에서 벌인 이 사이다 같은 반란극에 약소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까지 열광했다. 그는 독재에 신음하던 라틴아메리카는 물론이고 아프리카·아시아의 모든 나라 젊은이에게 희망을 쐈다. 턱수염을 기르고 올리브색 야전 점퍼에 시가를 피워 문,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그와 그의 동지인 아르헨티나의 의사 출신 전사 체 게바라의 사진은 전 세계 젊은이의 침실과 벽을 점령했다.

ⓒ한성원 그림
그로부터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신화는 빛이 바랬다. 세계 인권단체는 인권유린 국가 명단에 쿠바를 올리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휴먼라이트워치에 따르면 2014년 1월부터 8월 사이에 쿠바에서는 임의동행과 구금이 7188건이나 있었다. 시위 참가와 정치 토론은 금지돼 있고 거주 이전과 여행의 자유가 없다. 국경없는기자회 발표에 따르면 2016년 쿠바의 언론자유 지수는 180개국 중 171위 수준이다. 참고로 한국은 70위, 북한은 179위이다.

그동안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지금의 수치만 갖고 피델(그의 지지자는 물론 반대자까지 그를 이렇게 부른다)을 비난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그를 욕하기에 앞서 또 다른 숫자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638. 암호 같은 이 숫자는 피델이 그동안 10명의 미국 대통령과 칼을 겨누는 동안 모면한 암살 시도 횟수이다. 물론 쿠바 비밀정보국 수장을 지낸 파비안 에스칼란테의 증언이어서 과장됐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 CIA가 시도했다가 실패해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횟수만도 30회가 넘는다. 피델 본인은 CIA가 300회 이상의 암살을 시도했으리라고 믿는다. 특정인을 겨냥한 암살 시도로는 동서고금에 없는 진기한 기록이 아닐까.

그 기간에 피델은 아라파트네스크 식으로 살았다(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라파트가 이스라엘의 공격을 피해 거처를 수도 없이 옮겼던 데서 착안한 말이다). 외국에 나갈 때는 소련 국적기 두 대를 잡아놨다가 탑승하기 몇 분 전 비행기를 결정했다. 암살당할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의 전직 경호원에 따르면, 그는 속옷을 두 번 입는 법이 없었다. CIA가 세탁 과정에서 독약을 탈까 걱정해서였다. 실제로 CIA는 시가 폭탄을 만들거나, 치사량의 LSD(강력한 환각제)가 든 밀크셰이크와 그의 상징인 수염을 태워버리기 위한 샴푸를 고안하는 만화 같은 작전을 수행한 일도 있다.

피델은 혁명 직후만 해도 공개석상에서 공산주의자를 자처하지 않았다. 만약 미국이 일찌감치 싹을 자르겠다고 덤비지만 않았어도 그는 쿠바에 민주주의를 심겠다는 약속을 지켰을지 모른다. 미국은 1961년 망명자들을 앞세워 쿠바의 피그스 만을 무력 침공했다. 공격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나 그것은 냉전 상대였던 소련의 품으로 피델을 떠밀어버린 꼴이었다. 바로 이듬해 쿠바를 사이에 두고 미국과 소련이 아슬아슬한 핵 대립을 벌이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이를 계기로 쿠바에서는 소비에트 스타일의 일당 독재가 자리를 잡았다. 미국은 소련이 핵무기를 철수하는 대가로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은 지켰지만 분을 못 이겨 계속 자객을 보냈다. 그리고 2년 전 오바마 대통령이 피델의 동생인 라울과 데탕트를 위한 협상을 시작하기까지 그 긴긴 세월 경제봉쇄를 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어 지원이 끊긴 1991년부터 쿠바 국민은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을 해야만 했다.

피델이 사망한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그를 ‘야만적인 독재자’라 부르며 화해 협상을 백지로 돌릴 수도 있다는 뜻을 비쳤다. 트럼프는 “쿠바의 인권과 부를 증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다”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미국이 진정으로 쿠바 국민의 억압과 빈곤을 염려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다. 유독 트럼프 혼자서 그런 일을 해내리라고 믿기는 더더욱 어렵다.

쿠바 혹은 피델을 바라보면서 미국의 이해관계 속에 묶인 나라의 국민으로서 당연히 품을 수밖에 없는 의문이 있다. 미국은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혹은 미국의 안보에 직결된 위치에 있는 국가에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권이 들어서는 걸 과연 환영하기는 하느냐이다. 그렇다는 증거는 거의 없고 그렇지 않다는 증거는 많다. 한반도 북쪽의 정권이 점점 야만화하는 데 미국의 지분은 어느 정도일까. 그 과정에서 CIA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남한의 민주화가 자꾸 도돌이표를 찍는 것은 우연일까. 지금 미국의 이해관계가 크게 걸린 한반도 남쪽에 국정 공백 상태가 초래되는 걸 바라보면서 CIA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까. 박근혜 정부가 시계를 30년, 40년 전으로 돌려놓다 보니 걱정도 복고풍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란 제국,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숙제라고 피델은 말해준다.

쿠바는 모순으로 가득한 사회이다. 마치 세월호처럼, 바람도 지진도 없는데 아바나 시내에서는 건물이 밤새 스르르 무너져버린다. 손을 쓰기 힘들 정도로 낡았기 때문이다. 붕괴 위험에 직면한 건물을 보강하기 위한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보도되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시내 병원의 유능한 의사가 아들 생일에 장난감 로봇이라도 하나 사줄 돈을 벌려면 저녁과 휴일에 자가용 택시 영업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체제 속에서 “정부는 우리에게 임금을 주는 척하고 우리는 일하는 척한다”라고 냉소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놀랍도록 견고한 면이 있다. 너무 유명한 무상교육과 의료, 편리한 대중교통 체계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허를 찌르는 점은 많다.

쿠바는 재난에 대처하는 정교한 민방위 체제를 갖추고 있다. 재난 교육과 조기 경보 시스템, 기상학 연구, 비상 연락 시스템 등 정기적으로 섬을 할퀴는 허리케인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다. 대형 허리케인이 발생하면 주민은 순식간에 고지대로 대피한다. 사람들은 서로를 방문해 살피고, 탈출을 꺼리는 사람을 재촉하고, 사람들이 고립되는 걸 막아 놀랍도록 사망자가 적다. 2008년 허리케인이 닥쳤을 때 전 국민의 5분의 1이 넘는 261만5000명이 대피했는데 사망자는 단 4명이었다. 미국의 경우 대피 도중에 보통 100만명당 100명이 사망한다. 국제 빈민구호단체인 옥스팜의 미국 지부는 2004년 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쿠바인은 위험 감소를 위해 궁핍할 때도 사회자본을 꾸준히 쌓아왔다. 실질적인 구명 대책은 궁극적으로 물질보다는 관계와 훈련, 교육 같은 무형의 것에 더 많이 의존한다는 점을 뚜렷이 보여준다.”

미국의 오랜 경제봉쇄가 쿠바에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그 덕분에 쿠바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세계화의 덫, 즉 값싼 석유에 기반한 경제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전거·우마차·당나귀·풍차·수차가 돌아와 농촌 지역의 대기는 몰라보게 맑아졌다. 비료와 농약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유기농업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질박한 곡물과 채소만 집중 재배하는 바람에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요리가 가장 맛이 없는 국가라는 오명을 얻었지만 성인병 발생률은 현저하게 낮아졌다. 맛집이 사라졌다는 불만을 의식해서인지 피델은 국영 텔레비전에 출연해 에너지 절약형 압력 밥솥을 사용하는 법을 2시간이나 강의하곤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피델의 유산

피델은 “그들은 사회주의의 실패를 말하는데 이 세상 어디에 성공한 자본주의가 있는가.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라고 소리 지르곤 했는데 괜한 큰소리만은 아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는 피델의 리스트에 북미나 유럽까지 포함해야 할 지경이다. 국제 금융이 빈번하게 파탄 나고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은 파시스트에 가까운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점령해가는 중이다. 기후변화가 재앙에 가까워졌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점점 작아지고 있는 형편 아니던가. 세계화에 편입되지 못해 자립경제의 길을 걷다 보니 이룩하게 된 쿠바의 성과를 주목하는 이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만은 아마도 크게 놀라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식민 지배에 찌든 그곳에서는 차라리 판타지에 가까운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검은 개를 전멸시켰는데 그의 정적이 검은 개로 변신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니카라과의 소모사 가르시아는 쇠창살 칸막이 한쪽에는 사나운 짐승을, 반대편에는 정적을 가두었다. 엘살바도르의 도살자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는 사교에 빠져 사람은 부활하므로 죽여도 되지만 곤충은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남미의 지도자 가운데는 종교 열정에 빠져 자기를 메시아로 착각하거나, 정부 업무를 모두 남에게 던져줘버린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피델과 평생 피보다 진한 우정을 나눈 노벨상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백년 동안의 고독〉 작가)는 친구가 독재자란 비난을 받을 때마다 이런 얘기를 꺼내곤 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굳이 그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피델은 확실히 격이 다른 독재자였다. 그는 마르케스의 충고를 받아들여 정치범 3000명 이상을 석방할 정도로 드물게 자제할 줄 아는 괴물이었다. 그가 남긴 유산 가운데는 냉전과 천민 자본, 안전 불감증의 포로가 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특별히 많다.

참고한 활자:〈카스트로와 마르케스〉(예문), 〈이 폐허를 응시하라〉(도서출판 펜타그램), 〈내셔널지오그래픽〉, 〈인디펜던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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