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고사 세대다. 외우는 건 자신 있었다. 무조건 외웠다. 주기율표도, 국사 연표도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암기하며 유독 구시렁거렸던 게 있었다. 역대 정부 통일방안. 전두환 정권의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노태우 정권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도무지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점수를 받아야 하니 투덜대며 주요 내용을 외웠다. 머리가 굵고 나서야 알았다. 분단 구조가 얼마나 강고하고, 평화가 얼마나 어려우며, 통일은 또 얼마나 힘든지. 군사정권 시절에도 ‘피스 키퍼(peace keeper)’ 노릇을 하며 한반도 평화를 지켜내려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이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다. 임 전 장관 등 피스 키퍼들은 흑백의 중간지대를 넓히려고 애썼다. 1991년 맺은 결실이 남북 기본합의서다. 협상의 실무를 맡은 임동원은 한밤중 북측의 최우진과 맥주 담판도 불사했다(임동원, 〈피스 메이커〉). 남북 기본합의서는 노태우 정권 시절 체결되었지만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잇는 1990년대 평화의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그 임동원은 김대중 정부 때 ‘피스 메이커(peace maker)’가 되어 6·15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의 김대중 대통령, 2007년 10·4 선언(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을 주도한 노무현 대통령도 ‘피스 메이커’로 활약했다. 분단 이후 최초로 김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나는 장면에 우리는 눈시울을 붉혔다. 노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순간 우리는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그 감동과 설렘도 잠시였다. 피스 메이커들이 땅을 다지고, 주춧돌을 놓아도, ‘한반도 문제에서 주인’인 우리가 주도하지 않으면 ‘외풍과 역풍’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 문재인 대통령은 ‘피스 아키텍트(peace architect)’다. 문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놓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었다. 판문점 선언은 합의문으로만 그쳐선 안 된다. 남북관계는 더 이상 흑백논리에 가두거나, 통일 낙관론에만 젖어 있을 수 없다. 흑백으로 이념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제3의 길이 열리고 있다. 남한에도 보수적이지만 남북 평화를 바라는 ‘보수적 평화론자’, 진보적이면서 한·미 동맹을 바라는 ‘진보적 동맹론자’가 늘고 있다. 평화나 통일은 외워서 되는 게 아니다. 과정이다. 하나의 봄, 새 시대가 열렸다. ‘결코 뒤돌아 갈 수 없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때 운 좋게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8년 또 한 번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순간이다. 판문점 선언 전문을 이번 표지에 특별히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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