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명륜3가에 위치한 ‘30스튜디오’는 연희단거리패 창단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불이 난 건물을 헐값에 인수한 뒤 2016년 10월27일 문을 열었다. 개관 기념 개막작으로 이윤택 예술감독이 연출한 〈서울시민 1919〉가 상연되기도 했다. 공간의 마지막 주인공도 이윤택이었다. 2월19일 그는 조명 대신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라고 말했다. 관객은 어느 때보다 많았다. 뒤이은 연희단거리패 단원의 폭로에 따르면 이윤택은 ‘표정이 불쌍해 보이도록’ 이날의 사과 기자회견을 리허설했다.

이윤택은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작가 겸 연출가다. 최근 드러난 ‘거장’의 또 다른 얼굴은 성폭력 가해자다. 그와 작업했던 피해자들이 실명을 걸고 성폭력 사실을 고발한 연극계 ‘미투(Me Too) 운동’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그는 여성 단원들에게 밤마다 안마를 요구했고 연기 지도를 핑계로 몸의 주요 부위를 만진 ‘성범죄자’였다. 기자회견에서 성폭행은 부인했지만 임신, 낙태, 또다시 이어진 성폭행 등을 실명으로 증언하는 이들이 나오고 있다. 피해자의 규모는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다. 본인 역시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극단 내에서 18년 가까이 진행된 생활에서 관습적으로 일어난 아주 나쁜 형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장기간 다수에게 성폭력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시사IN 신선영2월19일 연극 연출가 이윤택이 성폭행 논란에 대해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불쌍해 보이도록’ 기자회견을 리허설했다는 폭로도 나왔다.

이윤택은 1973년 서울연극학교를 중퇴한 후 부산에서 도서 외판원, 우체국 행정서기보, 섬유 회사 염색기사 등의 직업을 거쳤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 〈결국 삶이다〉(도요출판사 펴냄, 2013년)를 보면 염색기사로 일할 당시 ‘조장은 여성 근로자 엉덩이를 만지고 음란한 농지거리를 해댔다’라고 고발하기도 한다. 1979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해 등단했고 〈부산일보〉 기자로 일하던 1986년 퇴사한 뒤 퇴직금을 털어 부산에서 가마골소극장을 열었다. 당시 그는 ‘현대판 남사당패’를 꿈꿨다. 유랑극단 형태의 자유로운 연극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 별신굿을 공연 형식으로 재현해 주목받은 뒤 극단 연희단거리패를 만들었다. 한국 연극의 원형이라 일컬어지는 전통연희와 거리굿에서 따온 명칭이다.

그는 연희단거리패에서 대표작 〈시민K〉 〈오구-죽음의 형식〉 〈바보각시〉 등을 발표하며 각종 상을 휩쓸었다. 1988년 서울 대학로 바탕골소극장에서 〈시민K〉로 첫 서울 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본격적으로 연출가의 길을 걷는다. 당시 기자였던 기형도 시인이 그의 인터뷰 기사에 ‘문학 아나키스트, 게릴라 식으로 서울 입성’이란 제목을 단 이후 ‘문화 게릴라’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95년 연산군을 재해석한 〈문제적 인간 연산〉으로 동아연극상 대상과 희곡상 등을 수상하는 등 경력의 정점을 찍는다. 그의 작품은 대중적이면서도 전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해외 여러 연극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이번에 그의 성폭력 사실을 실명으로 공개한 배우들 대부분이 1999~2000년대 초·중반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이윤택 스스로도 기자회견에서 ‘18년간’이라고 한정했다. 18년 전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가 연희단거리패를 이끌고 밀양연극촌으로 이주한 시기와 겹친다. 또 다른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하용부 밀양연극촌장의 과거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극단은 단원이 늘면서 연습실 부족 현상을 겪었다(하용부 촌장은 2월23일 현재 성폭행 의혹과 관련해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임차료가 비싸 도시에서는 수용하기 힘들었다. 1999년 이윤택은 밀양시장을 소개받았고 폐교를 연극촌으로 사용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응했다. 이윤택은 1999년 12월 서울에서 공연된 뮤지컬 〈태풍〉의 커튼콜에서 극중 인물의 입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남겼다. “20세기여 안녕, 저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경남 밀양에 자리 잡은 연희단거리패는 ‘이상적인 연극 공동체’를 표방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연극촌의 뒤편에 그가 살던 집 ‘월산재’가 있었고, 그 옆에는 단원들과 가족들의 숙소가 있었다. 2001년 여름 이곳에서 첫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를 연 이래 지난해까지 17회를 거치며 성공적인 지역 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김미도 연극평론가는 “가장 대표적인 지역의 연극축제다. 배우라면 누구나 참여하고 싶어 했고 실제 젊은 연극인들을 많이 배출했다”라고 말했다. 이윤택은 지역 연극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오랜 시간 평균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며 언론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던 그의 영향력은 단원들뿐 아니라 잠시 그곳을 거쳐 갔던 객원 배우들에게도 절대적이었다. 권력은 낮뿐 아니라 밤에도 이어졌다. 이번 ‘미투 운동’에 참여한 배우들의 증언에 따르면 여성 단원들은 돌아가며 밤마다 그를 안마했다. 처음엔 옷을 입고 있었지만 바지를 내리고 성기 가까이 그들의 손을 가져가기도 했다. 안마를 위해 선임이 자는 후배를 깨워서 방에 들여보냈고 시간이 지나자 그 후배가 선배가 되어 또 다른 신입을 깨웠다. 다수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었던 이유다. 그의 ‘손길’을 거부하는 경우 캐스팅에 불이익이 가기도 했다.

인적 드문 그곳은 누군가에게 공포의 공간

이러한 사실이 오랜 시간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데에는 합숙을 바탕으로 한 극단의 생활 방식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서울대 인류학과 권정은 연구자가 70여 명 규모의 밀양연극촌을 직접 참여 관찰한 뒤 쓴 논문 〈개인을 넘어서는 그 자리:연희단거리패의 의례로서의 연극과 자아의 재구성〉에 따르면 밀양연극촌의 분위기는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시되는 집단주의적 특성을 가지며 우리라는 울타리와 위계질서가 매우 강하다”라고 밝히고 있다. 연기는 물론 세트의 조립과 설치, 소품 디자인과 제작까지 모두 단원들이 담당하는 연극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극단적으로 강조되었고, 이에 불만을 가진 일부 단원들은 ‘독재’ ‘공산주의’라는 단어로 공동체를 묘사하기도 했다.

ⓒ연합뉴스경남 밀양시 부북면에 위치한 밀양연극촌은 이윤택의 성폭행 파문으로 문 닫을 예정이다.

2009년 이윤택은 공간을 확장한다. ‘명예로운 퇴장’을 준비한다며 김해시 생림면 도요마을에 땅 600평을 샀다. 밀양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그곳은 외부인에게 개방된 밀양보다 훨씬 폐쇄적인 곳이었다. 배우들은 밀양과 김해를 오가며 연습하거나 기거했다. 특히 인적이 드문 도요마을은 누군가에겐 공포의 공간이었다. 이번의 폭로 글 중 일부다. “한적한 시골마을. 몇 안 되는 극단 단원들은 자신의 연습 순서를 기다리며 밖에서 대기하고, 나는 연출가와 단둘이 극장 안에. 그리고 문은 굳게 닫혔다. (중략)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발성하는 위치라며 짚어주던 더러운 친절함.”

이윤택은 〈결국 삶이다〉에서 이곳에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의 집을 짓고 집마다 문패를 달았다고 서술한다. ‘최근에 또 한 쌍의 단원 부부가 입주했습니다. 연극배우 변○○, 홍○○ 신혼부부의 집도 마련되었습니다.’ 홍씨는 이번 미투 운동에 동참한 배우다. JTBC 〈뉴스룸〉에 출연한 그녀는 “(이윤택이) 나는 너와 너무 자고 싶다. 그러면서 ×× 얼마나 컸는지 볼까 하고 ×속으로 손이 쑥 들어와서 내가 급하게 피한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윤택의 연출 스타일도 배우들을 압도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는 특히 배우들의 육체성을 강조해왔다. 이영미 대중예술 평론가는 “이윤택도, (또 다른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오태석도 배우들의 몸에 대한 장악력이 굉장히 높은 연출자다. 어떻게 저 배우가 고통의 선을 넘어 저기까지 표현할까 싶을 정도로 가학성이 강하고 예컨대 벗는 것도 감수할 정도였다”라고 말했다(오태석 연출가도 2월23일 현재 성폭행 의혹과 관련해 공식적인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것이 평단의 좋은 평가로 이어지기도 했다. “독자적인 연출자라 배우들이 한번 겪고 나면 굉장한 자기 극복을 경험한다. 그래서 극단 출신들이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작품과 몸을 장악한 독재자가 어느 순간 욕망을 채우겠다고 마음먹으면 너무 쉽다. 배우들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계 전반에서 성폭행 폭로 이어져

이윤택 개인뿐만이 아니라 남성 연출가가 절대적인 연극판의 분위기도 있었다. 김미도 연극평론가는 “특히 2000년대 들어 작가와 연출을 겸하는 형태로 연극 환경이 변화하면서 여성들의 입지가 위축되었다. 여성 작가의 숫자가 줄었고 남성 중심의 연출이 연극계를 장악했다”라고 말했다. 이영미 평론가는 결국 권력의 문제라는 걸 지적한다. “행태가 독특해서 먼저 드러나긴 했지만 이들만 저지르는 일이 아니다. 연극은 몸을 움직이는 예술이라 연기 지도를 핑계 삼아 성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윤택도) 자기한테 불이익을 행사할 사람한테는 안 그랬다. 결국 권력의 문제다.”

이번 연극계의 미투 운동은 달라진 사회 분위기와도 연관이 있다. 과거 같으면 쉬쉬했을 성폭력 정황들이 SNS상에서 실명으로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피해자들이 비교적 오래전 사건을 고백하게 된 데에는 서지현 검사, 최영미 시인의 폭로를 비롯해 최근 몇 년간 이어져온 일련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20여 년 전 이윤택의 안마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한 극단 대표는 〈시사IN〉과 통화하면서 “당시엔 내가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다. 최근 지척에서 성추행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을 겪으면서 내가 성폭력에 대해서 몰랐다는 걸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연희단거리패 30년사 자료집〉에 따르면 이윤택은 본인의 2013년 작품 〈혜경궁 홍씨〉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번 작품이 일종의 페미니스트 연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요하게 참고한 〈한중록〉이 여성에 의해 쓰였고 여성 중심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분석이다. 정말 그럴까. 이윤택의 작품 역시 재평가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김미도 평론가는 “젠더 문제가 폭력적으로 나타난 경우는 없었는지, 그의 작품을 다시 성찰해봐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윤택으로 전환점을 맞은 ‘미투 운동’이 문화예술계 전반의 성폭력에 대한 폭로로 이어지고 있다. 이영미 평론가는 “연극계는 상대적으로 연극 권력만 벗어나면 끝이다. 자본과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방송계, 영화계 등으로 이어져야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폭로와 고백은 각계로 퍼지고 있다. 연극계에서는 피해자를 중심으로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이 만들어져 대응책을 논의 중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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