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 가는 외지 사람들은 주로 한옥마을과 남부시장에 찾는다. 그럼 광주에 가면? 얼마 전까지는 자신 있게 답하기 힘들었다. 지금은 광주도 답을 가지고 있다. 양림동과 대인시장이다. 대인시장은 야시장인 별장 프로젝트를 비롯해 입주 예술가들이 성공적으로 안착한, 전통시장 활성화의 대표 사례가 되었다.

광주의 구도심 중 하나였던 양림동은 교회가 많다는 것 말고는 외형적으로 그다지 특징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캐면 캘수록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는 흥미로운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인민 작곡가 정율성 선생과 차이콥스키 직계 제자인 정추 선생이 이곳 출신이다. 다형 김현승 시인이 시를 쓴 곳도 양림동 언덕이었다. 그 밖에 광주의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양림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부산 사나이인 쥬스컴퍼니 이한호 대표(35)는 이 양림동에 흥미를 느끼고 파고들었다. 왜 이 동네에서 세계적인 음악가가 많이 나왔을까? 왜 예술가들이 이 동네를 중심으로 활동했을까? 그는 이 의문을 풀고자 아예 광주에 사무실을 차렸다. 그가 내린 결론은 ‘양림동이 1980년 이전의 광주를 잘 설명해주는 곳이어서’라는 것이었다. 1900년대 초반 서양 선교사들이 선교의 구심으로 삼은 곳이 양림동 언덕이었고 그들을 통해 근대 의식을 갖게 된 광주의 청년들이 ‘모던보이’ ‘모던걸’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부산 출신 문화기획자 이한호씨는 광주 양림동에 흥미를 느껴 아예 광주로 내려와 사무실을 차렸다.
광주는 스스로를 ‘예향(藝鄕)’이라 부른다. 정부는 광주를 문화 중심 도시로 육성하기 위해 8000억원 가까이 들여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처럼 광주가 어떻게 ‘문화의 웅도’가 되었는지는 광주의 근대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이 대표는 말한다. 조선시대 전라도의 중심이었던 전주나 나주에 비해서 광주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다. 서양 선교사들이 정착하면서 근대화가 이뤄졌고 1930년대에 이르러 근대 문화가 만개했다.

1929년 11월4일 광주학생운동이 벌어졌다. 이 일로 호남의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퇴학이나 정학을 당했다. 그해 12월에는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이 기말고사에서 백지를 내는 ‘백지동맹’을 일으켜 추가 징계를 당했다. 이듬해인 1930년 봄 광주의 수재들은 양림동에 몰려들었다. 단순히 식민지 청년의 울분을 토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면서 시인·화가·음악가로 성장했다.

김현승 시인의 호를 딴 다형다방은 1930년 근대 광주를 복원하는 베이스캠프다. 이 다방의 주인인 가상의 인물 ‘마담 L’은 ‘청춘달빛투어’를 이끌며 광주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1930 사교클럽’에서 다른 가상의 예술가들과 로맨스를 펼치기도 한다. 다형다방은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시대로 들어가는 일종의 타임머신 같은 곳이다.

호랑가시나무 게스트하우스는 양림동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서양 선교사 사택을 개조한 이곳은 한 동은 게스트하우스이고 다른 한 동은 작가들의 레지던시다. 이곳을 운영하는 아트주 정헌기 대표(46)는 양림동의 터줏대감이다. 부산 사나이 이한호 대표를 ‘광주빠’로 만든 사람도 바로 그다. 오랫동안 지역에서 예술 기획을 해온 정 대표는 양림동이 현재에도 예술 활동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이곳의 문화 생태계를 일군다.

두 문화기획자는 지난해 가을 전국의 청년 문화기획자들을 양림동에 불러들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청년 문화기획자 수십명이 호랑가시나무 게스트하우스에서 밤샘 토론을 벌이며 경험을 나누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광주가 스스로 문화 중심 도시로 진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지역으로 간 청년들’ 그들이 이룬 성과는?

먹고 마시는 관광을 넘어 ‘이렇게 먹고사는 게’ 잘 맞는걸요 ‘도시어촌’에 가니 문화가 보이네

무진에서 황홀할 당신을 위해 1930년 광주를 여행하는 타임머신 ‘아이술크림’ 마시러 시장에 간다 괴나리봇짐 지고 부여로 오세요 ‘젤리데이’에 만나 관심사를 공유하자
기자명 고재열·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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