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에서 부는 바람은 역시 거칠었다. 순식간에 국경 지역의 판도를 바꿨다. 2년 만에 다시 찾은 중국 옌볜 조선족자치주는 마치 천지개벽을 한 듯했다. 지난해 자치주 설립 60주년을 기념해 중앙정부 지원으로 도시 전체를 말끔하게 재정비했다. 시내 주요 건물에 야광등을 설치해 밤에도 도시 전체가 휘황찬란했다. 반면 투먼·훈춘·팡촨 등 북한과의 접경지역은 활력이 완연히 떨어졌다.

10월23일 오후 1시40분께 훈춘 취안허 세관. 북한 나진으로 들어가기 위해 화물차들이 대기하고 있다. 2011년 8월31일 오후 2시쯤에도 이곳을 지났다. 그때와 비교해보니 차량이 훨씬 줄었다. 당시는 늦여름 오후 땡볕 아래였지만 활기가 느껴졌다. 취재에 응한 화물차 운전자는 “나진의 수산물을 옌지로 가져와 냉동한 뒤, 가공을 위해 다시 나진으로 가는 중이다”라고 말했다. 당시는 원정리-나진 간 도로 개·보수와 나선 지구의 인프라 정비를 위한 건설 자재가 많이 들어갔다. 지금은 북한과 중국 정부 간 사업이 대부분 중단돼, 수산물 등 민간 거래품 위주다. 취안허 세관에서 원정리로 이어지는 두만강철교가 낡아 그 위쪽으로 신두만강철교를 놓는 공사가 올해 초 시작됐다고 하는데,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웠다.

다만 집권 3년차를 맞는 김정은 시대 북한의 변화상은 여러 군데에서 느낄 수 있었다. 옌볜 도착 첫날인 10월20일 오후 허룽현 난핑 가는 길. 가뭄 탓에 실개천으로 변한 두만강이 차창 밖으로 흐르고 그 너머 북한 쪽 산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런데 재작년까지 봤던 그 모습이 아니다. 북쪽 산은 민둥산이라 강 너머 중국의 산과 확연히 구분된다. 그런데 이번에 본 모습은 전혀 달랐다. 산 밑에서 꼭대기까지 경작이 돼 있다. 방치했던 산자락에 한 톨의 감자와 옥수수라도 더 심도록 새로운 동기가 부여되었다는 의미다. 동행한 옌볜 대학 교수는 “집단농장에 신고만 하면 가족 단위로 개간할 수 있다. 소출의 일정량을 국가에 내고 나머지는 개인이 가져다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다들 열심이다”라고 설명했다.

ⓒ시사IN 남문희10월23일 오후 1시40분쯤 북한 나진으로 들어가기 위해 취안허 세관 앞에 줄 서 있는 화물차들. 2011년, 2012년에는 주로 건축자재들이 많이 들어갔으나 요즘은 수산물 가공품 등 위주로 예전에 비해 물량도 줄었다.
북한 음식점이 예전보다 많아진 느낌도 들었다. 조선족 동포가 북측 여성 종업원을 고용한 형태도 있었다. 옌볜 조선족자치주 내에 많게는 2만명 가까이 북한 인력이 진출해 있다고 하는데 그 일면일 수도 있다. 매번 투숙하는 옌볜 국제호텔 1층에 북한 측 여성들이 출연하는 ‘아리랑’이라는 가라오케도 예전에는 못 보던 것이다. 생긴 지 1년6개월 됐다고 한다. 10월22일 백두산 천지를 보고 온 날 저녁 일행과 구경을 갔다. 2012년 7월 창단 공연으로 화제를 불러 모은 모란봉악단 공연을 빼닮았다. 기타와 전자오르간으로 이뤄진 밴드인데,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올라온 개량 한복을 입은 ‘4인조 걸그룹’이 화려한 율동과 함께 마이웨이, 러브스토리 등 팝송을 자연스럽게 부른다. 대부분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의식해서인지 칠갑산을 비롯한 1960~80년대 한국 노래를 부르고, 손님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흥을 돋우기도 한다. 예전에 볼 수 없던 장면들이다.

“지금이야말로 북한의 변화 이끌어낼 기회”

10월21일 옌볜 대학 과학기술청사 8층 회의실에서 열린 ‘2014 한·중 학술회의’(옌볜대 동북아연구원과 한국 평화문제연구소 주최 ‘북한의 변화와 동북아 평화 구축을 위한 한·중 협력방안’)에서도 북한의 변화에 대한 소개가 많았다. 나진·선봉(나선)이 이미 시장경제에 접어들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나선의 북측 여성들이 1등 신랑감 후보로 과거에는 당 간부나 군 간부를 선호했는데, 요즘은 장사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신풍속도도 전했다. 개인 명의의 사기업은 어렵기 때문에 집체기업 이름을 내걸고 여러 사람이 투자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이 회사를 소유하는, 이른바 ‘빨간 모자를 쓴 자본가’도 등장했다고 한다.

랴오닝성 사회과학원의 김철 박사는 ‘핵·경제 병진전략’의 이면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바깥에서는 주로 핵에 방점을 찍고 보지만 북한 내에서는 경제개발에 방점이 찍혀 있다. 더 이상 인민 생활을 희생해가면서 국방 건설을 하지 않겠다는 점에서 선군정치와 다르다. 국방은 핵으로 해결하고, 재래식 전력 자금은 인민 생활 향상에 돌리겠다는 점에서 이전과 달리 평가한다”라고 말했다. 옌볜 대학 동북아연구원 현동일 원장은 2012년 3월 박봉주의 내각 총리 복귀 후 변화상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했다. 북한에는 내각 주도 경제 외에도 1990년대 초 경제난 속에 공식화된 당 차원의 경제, 선군정치 시대에 등장한 군 경제, 1980년대 후반 이래의 시장경제 등이 합쳐져 국민경제를 형성한다. 그런데 김정은 체제 등장 후 제일 먼저 군 경제 소속의 광산과 기업소가 대거 내각 소속으로 전환했다. 장성택 처형 후에는 당 행정부가 특권으로 쥐고 있던 기업소들 역시 내각에 편입되었다. 내각이 국민경제 통제권을 확립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경제관리 개선 조처를 통해 국민경제의 활력을 높인다. 베이징 대학 진징이 교수가 평양 방문 길에 확인한 5·30 조처가 바로 그것이다. 중앙정부 기능을 각 기업소나 농장의 지방 단위로 대폭 보내 자율에 맡기는 조처다. 김철 박사는 5·30 조처가 ‘5·30 노작’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현재 평양 인민경제대학에서 간부를 대상으로 교육 중이며, 6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고 한다. 현동일 원장은 현재의 북한 변화에 대해 ‘주동적이라는 점, 전방위적이라는 점, 최고 엘리트에까지 파급되고 있다는 점’ 등을 주요 특징으로 꼽았다. “지난 3년간 엘리트층의 변화를 보면 앞으로 더 큰 정책 변화도 추진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지적한 현 원장은 “지금이야말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낼 절호의 시기다. 이때를 놓치면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른다. 한·중이 협력해서 변화를 이끌어내고 동북아 평화에 활용하자”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2011년과 2012년에는 중국의 열기가 뜨거웠던 반면, 북한의 준비가 미흡했다. 2009년 원자바오 총리 방북으로 창지투(창춘·지린·투먼) 계획과 나진·선봉 연계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훈춘·투먼 등 접경 도시는 나진항·청진항을 통한 차항출해(借港出海)를 경쟁적으로 추진했다. 그런데 지금은 북한 쪽의 변화 열망이 끓어오르고 있는 데 비해, 중국 쪽 열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북·중 간의 자존심 싸움 때문이다. 김철 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2012년 4월15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가 실패하고 12월 재발사할 당시 북한에서는 중국이 유엔 제재에 동참할 걸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이 동참하자 충격을 받았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판단 아래 3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자존심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옌볜 대학 이종림 교수는 “중국도 관계 회복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남북 관계가 먼저 풀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시사IN 남문희연볜 국제호텔 1층에 있는 ‘아리랑’ 가라오케에 출연한 북한 ‘4인조 걸그룹’.
중국 런민(人民) 대학 청샤오허 교수의 발표는 논쟁적이었다. 그는 “북한이 중국과 힘겨루기를 하지만 주도권은 중국이 쥐고 있다. 북한이 계속 중국을 자극하는데 중국이 지금까지는 참고 있다. 그러나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올해 말까지 계속 사이가 나빠지면 북한 정권의 생존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라고 경고성 발언을 했다. 청샤오허 교수의 견해는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와 혈맹 관계를 중시하는 중국의 당이나 군의 전통적 견해보다는 미국과의 신형 대국 관계를 중시하는 국무원이나 신진 학자들 견해에 가깝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이 북한 비핵화에 성의를 보이면 미사일 방어(MD)를 중단할 수 있다”라고 한 데 이어 최근 “주한 미군 병력도 삭감할 수 있다”라고 한 것 역시 중국 내 이런 견해를 고무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청샤오허 교수의 주장대로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북한 정권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을까? 북·중 접경 지역에서는 이미 세력 교체가 역력했다. 중국의 힘은 이미 퇴조하고 있었다. 2011년 6월 장성택 당시 당 행정부장과 천더밍 중국 상무부장 간에 합의된 나진·선봉 개발 관련 시범사업이 대표적이다. 이미 완공된 원정리 도로 개·보수와 관광이 진행되는 것 말고는 농업 시범사업, 훈춘의 전력 공급, 창춘 야타이 사의 시멘트 100만t 생산 등이 모두 중단됐다. 나진항과 청진항을 통한 출해의 꿈 역시 벽에 부딪혔다. 2010년 12월23일 북·중 간에 나진항 4, 5, 6호 부두 독점 개발에 관한 합의가 이뤄진 뒤 홍콩의 자오상그룹이 독점 개발권을 따냈다. 그런데 이번에 훈춘시 고위 당국자에게 확인한 결과, 자오상그룹이 도면까지는 만들었으나 착공은 하지 않았다. 나진항 1호 부두로서 훈춘의 석탄을 상하이 닝보로 실어나르던 촹리 사 역시 채산성 악화로 운항을 중단했다. 석탄 가격 하락으로 운임을 감당하기 힘들게 됐고, 벌크 화물인 석탄을 싣고 갔다가 돌아올 때 싣고 올 화물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투먼의 하이화그룹이 청진시와 추진해온 청진항 부두 사용권 교섭도 북한 중앙의 승인을 얻지 못해 진전이 없다.

ⓒ시사IN 남문희
ⓒ시사IN 남문희허룽현 난핑 가는 길에 목격한 북한의 뙈기밭. 예전에는 민둥산으로 방치했으나 최근 감자와 옥수수를 심어 개간하고 있다.
북한과 중국 사이 냉기, 비집고 들어오는 러시아

중국이 이처럼 북한과의 관계 진전에서 벽에 부딪힌 반면, 그 공간을 재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세력이 있다. 바로 러시아다. 지난해 9월 나진-하산 철도를 연결한 데 이어, 시베리아 석탄을 나진항에서 부산항으로 수송하고 부산항에서 오스트레일리아산 철광석을 싣고 다시 나진항으로 돌아오는 벌크 대 벌크의 운송 시스템을 이미 구축했다. 더욱이 나진항을 러시아 극동함대의 주둔지로 활용할 계획이기도 하다. 훈춘시 고위 당국자는 “나진항에 우리는 접근할 수 없는 북측 군항이 있는데 그곳을 이용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는 올해 초부터 청진에 러시아 경제특구를 개발하려는 움직임도 보여왔다. 즉 물류 거점인 나진항과 연계해 청진을 산업 거점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다. 지난 10월21일 동평양역에서는 러시아가 20년에 걸쳐 250억 달러를 투자해 북한 철도의 70%를 현대화하는 포베다(승리) 프로젝트의 첫 삽을 뜨는, 재동역-강동역-남포역을 잇는 철도 개·보수 착공식이 열렸다. 평양 인근 주요 산업철도인 이 노선의 현대화를 계기로 러시아는 남포에도 특구를 조성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올해 들어 중국이 북한에 대한 원유 지원을 축소해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난 3월부터 그 부족분을 러시아가 메워주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러시아가 전광석화처럼 북한에 파고들 수 있는 것은 북한의 기간산업 대부분을 러시아 자본과 기술로 건설했기 때문이다. 국내의 한 전문가는 “북한에게 러시아는 친부(친아버지), 중국은 양부(양아버지)에 비유할 수 있다. 지금 북한은 친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양아버지인 중국이 북한을 길들이려고 밀어붙이는 찰나에, 뜻하지 않게 친아버지가 찾아온 셈이다. 중국이 최근 유엔의 대북 인권 결의에 제동을 건 것도 더 밀어붙이다가는 중국의 영향력만 상실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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